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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메모

졸전! 한국대표팀 WBC 1라운드 탈락을 마주하는 자세는?

양현종이나 김광현이 대표팀 부동의 에이스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최약체 대표팀이라는 현주소다. (사진 출처 - KIA 타이거즈)


북미, 중남미권의 1라운드가 막이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WBC 대회가 뜨거워지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한국 대표팀이 일찌감치 대회에 탈락하면서 남의 잔치가 되고 만 것이다. 사실 2013 WBC 대회에 이어서 이번 대회도 최약체 투수진으로 평가되면서 우려의 시각이 있었다.





역대 대회의 국내 리그 출신 선수들의 FIP+만 봐도 리그를 지배한 선수가 많지 않음이 드러난다. 06년 해외파의 대거 참가로 정예를 구성할 수 있었던 시기를 제외해도 매년 수치가 점진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FIP+가 110이 넘는 선발 투수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은 대표팀의 취약점을 바로 드러낸다. 양현종이 현재 리그에서 가장 믿음직한 선발 투수라고는 하나 국내에서 뛰는 외국인 투수들과 비교하면 경쟁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반에 야수진에 대한 우려는 상대적으로 투수진만큼 심하진 않았다. 김현수, 강정호, 추신수, 박병호 등 해외파들이 대거 불참했으나 이대호, 김태균, 최형우, 박석민, 손아섭 등 중심타자들의 힘이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국내 리그의 타고 투저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엔트리에 포함된 WBC 경력자들과 이전 해외리그에서 활약을 통해 추정한다면 이러한 신뢰는 근거가 없지 않다.




실망스럽지만 충격적이지 않은 2패


하지만 이러한 신뢰는 이스라엘과의 1차전에서 보기 좋게 무너졌다. 믿었던 한국 팀의 타선이 이스라엘 투수진의 물량 공세에 틀어 막히면서 10이닝 동안 단 1점을 따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겨우 3이닝을 던진 MLB 출신 선발 제이슨 마키의 호투 덕이라고 핑계를 댈 수는 없다. 마퀴는 전년도 부상으로 뛰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한국 팀이 공략하지 못할 구위의 공을 던지진 않았다. 7회 심판이 이현승의 밀어내기 실점을 오심에 가까운 콜로 막아주었음에도 점수를 따내지 못하는 모습은 한국 야구팬의 고개를 떨구게 하였다.


이날 패배의 원인은 여러 가지 다양한 요소가 있다. 활용하지 못할 멀티 자원이라는 이유로 최정 대신 허경민을 뽑은 대표팀 발탁, 부상과 부진의 이유로 최형우, 박석민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선수 기용, 페이스가 좋았던 원종현을 일찍 강판하면서 오승환을 빨리 등판시킨 투수 기용 등 결과론이라고 할지라도 아쉬운 장면들이다. 이스라엘 중견수 샘펄드의 호수비와 대비되어 내야진의 수비력도 만족스럽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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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만 보자면 이대호가 네덜란드 메이저리거보다 결코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야구는 단기전 스타플레이어의 활약을 담보하는 종목이 아니다. (사진 출처 - Laura Smith님 플리커)


그래도 결정적인 패인을 꼽는다면 A조 탑클래스 타자라고 여겨졌던 김태균과 이대호의 침묵이다. 두 선수는 이날 8타수 무안타 8개의 잔루를 기록하며 많지도 않은 찬스를 무산시켰다. 김인식 감독은 3이닝 마무리한 자이드를 한화의 오간도보다 나아보인다고 비호했지만, 국내리그 1 옵션 외국인 투수와는 차이가 있는 커리어를 쌓은 투수다. 애초에 어려운 승부였다는 인터뷰는 핑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이스라엘전 패배는 한국팀의 계획을 완전히 어그러지게 만들었다. 네덜란드 상위 타순의 시몬스, 보가츠, 스쿱, 그레고리우스는 모두 메이저리그 주전 내야수들이고, 발렌틴은 한때 일본에서 60홈런을 친 강타자다. 프로파도 장타자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에는 없는 현역 메이저리거. 김인식 감독이 인터뷰에서 네덜란드 전력이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표현할 만큼 선수와 코치 모두 이름값에서 주눅 들어 있었다. 선발로 양현종이 아닌 우규민을 등판시킨 이유는 정공법이 아닌 옆구리 투수에게서 오는 생소함을 노린 변칙에 가까웠다.


안타깝게도 우규민의 등판은 그리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다. 우타자 시몬스는 대회 3안타 중 두 개를 우규민을 상대로 뽑아내며 쉽게 공략했고, 5명의 메이저리거 중 가장 장타력이 떨어지는 프로파가 1회 홈런을 치며 초반 3점을 헌납하고 만다. 프로파도 메이저리그 통산 648타석 동안 12개의 홈런을 칠 만큼 한 방이 있지만, 슬러거 타입과는 거리가 있다.


따지고 보면 경기 결과는 비록 5 : 0으로 일방적이었으나 선수 구성이나 타선의 힘 자체가 한국 팀이 크게 밀린다고 하기 어렵다. 발렌틴을 제외하면 5명의 MLB 출신 선수들은 모두 유격수에 가까운 포지션 중복이다. 보가츠는 향우 메이저리그를 호령한 5툴 플레이어지만 92년생 어린 야수로 아직 꽃을 피우기 전이다. 스쿱이나 그레고리우스도 장타력에 비해 빈틈이 있는 투수들. 국내리그 정상급 투수라고 하면 도저히 상대 못 할 타선은 아니라는 의미다. 또 6회 투런 홈런으로 한국 팀에 비수를 꽂은 오두버는 미국에서 6년간 싱글A에서 머물다 작년 네덜란드 리그로 선회한 좌절을 겪은 선수다. 한국 대표팀의 부족한 집중력이 아쉬운 한편 상대에 대한 야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더욱 실망스러웠던 쪽은 역시 타선이다. 삼성에서 뛰었던 벤덴헐크는 A조 최고의 선발임이 분명하지만, 프리 시즌이라 영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여서 충분히 공략 가능했다. 2, 3회 결정적 더블플레이가 아니었더라면 1~2점 차 추격하는 선에서 3이닝 내 강판당하는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다. 


또 네덜란드는 유독 투수층이 얇은 팀이다. 대표팀의 주력 선수가 네덜란드 본토와 멀리 떨어진 작은 섬 퀴라소 출신으로 인재는 유격수에 몰려 있다. 투수 중 메이저리그 출신은 긴 시간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저전스와 작년과 재작년 독립리그에서 활동한 마티스뿐이다. 그 외에는 모두 네덜란드 리그 출신이고, 마이너리그도 트리플A 수준까지 도달한 투수는 없다. 한국 대표팀이 이 정도 투수진을 상대로 1점도 내지 못한 것은 상대의 활약에 대한 칭찬을 떠나서 졸전이라는 멍에를 피할 수 없게 만든다.




대표팀에 대한 비판, 입에 쓴 약이 되려면


최악의 결과를 낸 대표팀에는 당연하게도 냉혹한 비판과 가슴을 저미는 비난이 함께 하고 있다. 제일 크게 포커스가 맞춰지는 부분은 태도 문제다. 한국전 에이스를 출동시킨 이스라엘과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패배는 당혹스럽지만 이변이라고 할 만한 결과는 아니다. 야구라는 종목의 특성상 단기전에서 아마와 프로 수준의 전력 차가 아니라면 승패는 항상 예상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는 WBC 초기 대회에서 한국이 미국을 꺾는 이변을 반대로 겪어본 바 있다.





다만, 팬들이 느낀 실망은 당시 미국 대표팀이 보였던 여유만만한 태도를 지금 한국 대표팀 선수들에게서 봤다는 것이다. 투지를 다해 기적을 일으켰던 선배들의 모습과 대비되어 패배를 웃음으로 받아들이는 현재 모습에 야구 팬들은 분개했다. 박찬호 해설위원의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는 멘트는 근거가 없지 않다. 실제로 한국 대표팀은 네덜란드 소수의 메이저리거들을 제외하면 A조에서 가장 배부른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단순히 이전 대회의 사례를 떠올리며 투혼을 발휘하리라는 발상은 착각일 뿐이다.



웃는 상으로 비아냥의 대상이 된 김재호는 KIA 빵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WBC가 경기 중 웃으면 안 될 만큼 권위적이고 희생을 요구하는 대회였던가?


한편으로는 과연 이러한 대표팀의 태도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WBC 대표팀 선전을 기원하는 명분 중의 하나는 좋은 성적으로 야구 붐을 일으키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 그런데 프로야구의 관전 문화가 자리 잡고, 해외파 선수들의 성공이 야구 꿈나무들의 유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 됐다. FA 시장의 인플레를 냉소적인 눈길로 바라볼 학부모가 있을까? 괴랄한 액수인 4년 150억을 받는 이대호가 WBC를 위해 일찌감치 몸을 만들어 시즌에 오버 페이스 된다면 이는 그것대로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다. 배부른 자에게 있지도 않은 동기 부여를 끌어낼 방법도 명분도 부족하다.


그보다 WBC를 통해 느껴야 할 비통함은 따로 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에이스가 없는 대표팀의 현실은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약점이다. 매번 아마추어 야구에서 혹사가 벌어지지만, 성적만 보고 이를 시행한 야구 지도자가 대표팀 감독이 되는 게 한국 야구의 관행이다. 고교 야구와 대학 야구에서 투수들의 팔은 지나치게 소모되고 있다. 프로야구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선발을 키우는 장기적 육성 또한 부족하다. 리그 탑 유망주라던 조상우가 2년간 불펜에서 혹사에 가까운 등판 후 곧바로 에이스가 될 수 있었을까?


경기력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시몬스를 비롯해 생소한 고척돔 그라운드에서 안정적이면서도 신속한 수비를 보여준 네덜란드 내야수들의 모습은 타격이나 투수력보다 현격한 클래스 차이를 느끼게 했다. MLB 급 강한 어깨를 바로 따라잡지는 못하더라도 한 발 더 앞에 가는 전진 수비와 전력 분석을 통한 수비 시프트는 프로야구에서도 배워야 할 점이다.


어느덧 4회째를 맞는 WBC는 야구의 세계화와 리그 교류 등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며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의 1라운드 탈락 후폭풍도 리그 발전의 긍정적인 자양분이 되길 바란다. 정말 오랜만에 야구라는 경기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기에 패배의 안타까움 이상으로 즐거움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