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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메모

류현진 없는 프로야구, 2군 에이스 있다

올해 프로야구는 유독 토종 에이스의 존재감이 부족하다는 뉘앙스의 기사들이 많이 보인다. 이런 미디어의 지적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지난 7년간 프로야구 위에 군림했던 존재인 류현진이 미국으로 떠났고, 김광현과 윤석민은 올해 평범한 투수처럼 던지고 있다. 시즌 초반 2점대 평균자책점과 FIP로 무적모드를 이어가던 윤성환도 6월 이후 페이스가 다소 하락했다. 엄밀히 말해 리그를 지배한다는 인상을 주는 국내 투수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국내 리그 선발투수들의 전체적인 경기력이 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난 5년간 외국인 투수를 제외한 선발들의 평균자책점과 FIP를 보면 작년을 제외하고 오히려 낮은 편에 속한다. 시즌 평균자책점과 비교해도 마찬가지. 또 평균 이닝은 근소하게나마 두 번째로 높았다. 한 마디로 국내리그는 영웅 없이도 그럭저럭 잘 꾸려 나가고 있다.




그럼 국내 프로야구는 전성기 '류윤김'의 공백을 어떻게 메우고 있는 걸까? 바로 퓨처스리그에서의 수혈이다. FIP를 기준으로 현재 선발 투수 중 가장 높은 공헌도(WAR)를 기록 중인 선수는 우규민이다. 올해 전까지 우규민은 구원 투수라는 인식이 많았다. 그래서 LG가 우규민을 선발로 기용했을 때 과연 수월하게 적응하느냐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하지만 우규민은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는 안정적인 활약 중이고, LG 1위 등극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오프시즌 전 약점으로 지적된 LG의 3~5선발 자리에 우규민이 골든글러브급 활약을 해주니 성적은 자연스럽게 오른다. (사진 출처 - LG 트윈스)


우규민이 올해 선발투수로 성공한 배경에는 2010년부터 2년간 경찰청에서의 단련을 빼놓을 수 없다. 2003년 LG 트윈스에 입단한 우규민은 2006년부터 풀타임으로 1군에서 뛰었고, 커리어 내내 불펜 보직에 있었다. 갈수록 성적이 떨어지며 '불규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얻었는데 군 복무를 통해 자신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우규민 2군 성적

2010년 경찰청 34G 136.0이닝 3.11ERA 97삼진 38사사구 3피홈런 122피안타

2011년 경찰청 19G 123.1이닝 2.34ERA 81삼진 29사사구 5피홈런 104피안타


경찰청에서도 처음부터 뛰어난 활약을 하지는 않았다. 첫해 한 달간은 불펜에서 뛰었는데 세이브 숫자는 많았지만, 13경기 16.2이닝 5.94ERA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선발로 전향한 2010년 5월 17일 첫 경기도 3.2이닝 5자책으로 무너졌다. 만약 1군에 있었다면 선발 기회를 이날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당시 우규민에게는 2년의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 상태였다. 다음 경기부터 우규민은 3경기 연속 7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선발 보직에 완벽히 적응했다. 그리고 2년간 싱커 등 보조구질을 날카롭게 가다듬으며 명실공히 퓨처스리그 최고의 투수로 거듭났다. 


제대 후 우규민은 다시 불펜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2012년 55경기 75.1이닝 동안 2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자신의 성장을 알렸고, 2013년에는 잠수함 투수라는 불리함을 이겨내며 선발로 재탄생한다. 경찰청에서 체력과 세기를 가다듬지 않았다면 이런 변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희관 2군 성적

2011년 상무 22G 101.0이닝 3.65ERA 69삼진 25사사구 8피홈런 116피안타

2012년 상무 21G 124.0이닝 2.40ERA 80삼진 21볼넷 9피홈런 128피안타


퓨처스리그의 스타는 우규민뿐 아니다. 두산의 소중한 좌완 선발 유희관과 필승조 오현택도 2군에서 만들어진 선수들이다. 대학 시절부터 제구력에 의존하는 투수였던 유희관은 프로에서 쉽게 기회를 받지 못했다. 그래도 두산은 두 선수의 가능성을 믿고 상무와 경찰청에 보냈고, 2년간 주로 선발로 뛰며 무려 225.0이닝 262.1이닝을 던졌다. 경기 수가 한정된 퓨처스리그에서 일정한 로테이션을 100이닝 이상씩 던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만큼 상무 시스템 내에서 두 선수는 투자됐다는 뜻이다. 빠른 볼 스피드가 겨우 130km 초중반을 형성하는 유희관은 타고난 스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 선수가 대학에 입학하고, 2군에서 인내하며 총 8년의 세월 동안 1군 선발투수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한 편의 인간 드라마처럼 느껴진다.



이재학 2012년 NC2군 21G 139.2이닝 1.55ERA 100삼진 39볼넷 4피홈런 98피안타

백인식 2012년 SK2군 15G 94.2이닝 2.76ERA 62삼진 22볼넷 1피홈런 94피안타 


올해 신생팀 NC의 선전에도, SK의 후반기 돌풍에도 퓨처스리그의 중요성은 두드러진다. 1군 입성까지 2군에서 보낸 1년 NC는 이재학을 선발로 전향시켜 토종 에이스를 만들어냈다. 구장 효과를 고려해야 하지만, 이재학의 2012년 2군 성적은 상무, 경찰청에서 뛰었던 우규민이나 유희관에 뒤지지 않는다. 위 세 명의 성공으로 퓨처스리그 에이스들의 1군 집입에 대한 전망은 한층 낙관적으로 변할 듯하다. 이들만큼은 아니지만 이전까지 무명에 가까웠던 SK의 백인식도 작년 2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후반기 6경기 34.1이닝 1.8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백인식이 없었다면 SK의 후반기 돌풍도 쉽지 않았다. 또 올해에 한정하지 않는다면 SK와 넥센에서 마무리로 활약 중인 박희수와 손승락도 경찰청에서 키운 스타로 분류할 수 있다.



1년 전 우규민이 섰던 자리에서 같은 상을 받은 윤지웅은 2013년 라이징 스타 후보 중 한 명이다. (사진 출처 - LG 트윈스)


작년 류현진에 이어 오승환, 윤석민 야수로는 최정, 강정호, 김현수 등이 미국 혹은 일본 리그의 문을 노크하리라 예상한다. 국내 최고 스타들의 해외진출 러쉬는 리그 경쟁력을 생각하면 우려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를 제도적으로 막는 일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앞서 강조한 대로 2군 시스템을 더욱 발전시켜 풍성하게 만드는 방식이 훨씬 효율적인 대안일 것이다. 실제로 올해 상위 팀을 보면 2군의 선수 육성이 1군 성적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2년간 삼성을 우승으로 이끈 최형우, 박석민 듀오는 상무와 경찰청에서 기량을 만개한 대표적 사례다. 두산의 깊고 깊은 선수층은 적절한 입대와 이천 구장의 성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하위권에서 허우적 되는 한화, KIA는 오랫동안 2군 인프라와 육성이 엉성했던 팀으로 꼽힌다.


어떤 이는 2군 구장이 너무 좋으면 선수들이 1군에 올라올 생각이 사라져 위험하다고 말한다. 또 경기에 제대로 투입되지 않아도 1군에 올리고 보자는 의견도 종종 발견한다. 그러나 올해 2군 에이스들의 성적을 보면 이런 생각은 기우에 불과하며 시류에 맞지 않는 생각이라 여겨진다. 1군에서부터 선수를 키워 좀 써볼 만하면 FA로 보내는 것보다 2군에서 충분히 공을 들여 차근차근 단계를 밟는 게 선수와 구단 입장에 안전하고 효율적인 방식 아닐까? 쉽게 눈에 띄지 않더라도 2군을 주목하라! 그곳에 당신이 응원하는 팀의 미래가 그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