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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메모

'리틀 쿠바' 박재홍의 위대한 커리어

박재홍은 한국 프로야구 최초, 유일의 200홈런 200도루 달성자다. (사진 출처 - SK 와이번스)


당신은 박재홍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루키 시즌 30-30을 달성한 호타준족의 대명사. 5개의 우승 반지를 낀 역대 최고의 외야수. 으리으리한 92학번 야구 선수 가운데서도 타고난 천재.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대단한 레전드가 자신의 커리어 만큼의 환호 받지 못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이야기지만, 울타리가 확실하지 않아 회자가 덜 된다고 할까?


우선, 프로야구 입단 시작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고교 시절 박재홍은 리그를 뒤흔든 선수답게 호남 야구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당연히 고졸 우선 선수로 지명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리라 믿었건만 결과는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당시 현대는 기존 프로팀과 갈등이 빚을 만큼 강한 자금력으로 무리한 스카우트를 했고, 박재홍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해태는 최상덕과 지명권을 맞바꾸는 트레이드로 박재홍을 포기했고, 타이거즈 팬들에게는 고향을 저버린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버렸다.  


돌이켜 보면 자신의 가치를 가장 인정해주는 곳으로 마음을 정한 박재홍의 선택은 무작정 비난할 일만도 아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팬들이 느낄 반감 또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박재홍은 광주 원정 경기에서는 수비 도중 깡통이 날아올 정도로 야유가 심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의 길을 간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박재홍은 프로 첫해 .295의 타율 30홈런과 36도루를 기록하며 무시무시한 활약을 했다. 과정의 논란이 있었지만, 1996년 신인 최초 올스타 최다 득표의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30-30 클럽을 달성한 1998년에는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구단 최초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세 번째 30-30 기록을 달성했던 2000년에도 박재홍은 우승 반지를 끼게 된다. 말 그대로 야구 인생의 전성기라 불릴 만하다.




 2004년 준PO 지고 있는 경기 누군가가 빵을 먹었다? 박재홍은 아니라는 결론! 그런데 정말 빵 먹으면 안 되나? (OBS 방송 캡쳐)


그러나 현대 유니콘스가 인천을 버리고 서울행을 원했듯이 2002년 시즌 후 박재홍은 젊고 효율적인 플레이어 정성훈의 대가로 해태로 트레이드되고 만다. 과거를 생각하면 박재홍에게는 유쾌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여기에 KIA로 이적한 지 두 번째 시즌인 2004년에는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나가지 못하며 태업성 플레이를 한다는 오해를 샀고, 팀 분위기를 해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FA를 앞둔 선수가 경기를 대충 뛸 리도 없거니와 출장 일수에 민감한 것은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성적을 못 내는 몸값 비싼 선수는 으레 그렇듯 밉상이 되기 마련이다. 이 시기 나온 '빵재홍'이라는 억울한 별명은 박재홍이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 대변하는 사례다.   


결국, 박재홍은 2004년 출장 일수가 모자라 FA 자격을 채우지 못했고, 구단과의 불화로 결국 SK로 트레이드됐다고 한다. 받아온 선수는 이름값에서 많이 기울어지는 김희걸이었으니 타이거즈와는 영 궁합이 맞지 않았던 셈이다. 어찌 됐건 박재홍이 다시 인천으로 돌아온 것은 모두에게 다행인 일이었다. 박재홍은 SK에서만 다시 8년을 뛰며 300개의 홈런을 채웠고,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다시 3개의 우승 반지를 꼈다. 비록 박재홍이 주인공은 아니었다고는 하나 전설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박재홍의 62번은 영구 결번이 되지는 못했지만, 인천 야구 팬들에게는 가슴 속 깊이 남을 것이다. (XTM 중계 캡쳐)


2013년 5월 18일. 모두에게 뜻깊은 이날에 박재홍은 성대한 은퇴식을 치렀다. 비가 오고, 타 구단 경기가 끝나지 않아 집중력이 반감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박재홍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재홍이 모든 야구 팬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하나라는 것은 조금도 틀림이 없다. 


참고로 타격만으로 통산 WAR(승리 공헌도)을 매기면 박재홍은 야수 중 10위권 전후에 위치한다. 여기에 포지션과, 수비 주루를 적용하면 무난하게 다섯 손가락 안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공•수•주 가장 완벽했던 5툴 플레이어. 게다가 선수 생활 말미에는 선수협회장을 맡으며 똑 부러진 일 처리로 그간의 자신을 둘러싼 부정적인 이미지를 상당 부분 해소시켰다. 이제는 야구 해설가로 순조로운 출발을 하며 팬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려고 한다.


박재홍은 은퇴식 마지막에 자신의 고향이 광주임을 밝히고, 제2의 고향 인천 팬들에게 사랑한다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다소 뜬금없지만 뜨겁게 다가온 이 멘트는 박재홍의 야구 인생을 가장 적절히 표현해주지 않았나 싶다. 누군가 박재홍에 대해 묻는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광주가 낳은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포지션 플레이어, 그리고 인천 야구와 함께해온 슈퍼스타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