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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메모

V8 삼성 왕조, 전설을 써내려 가다



이제 21세기 최강 팀이라는 표현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11월 11일 삼성이 넥센을 상대로 11 : 1의 대승을 거두면서 시리즈 스코어 4승 2패로 4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이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연패를 했던 해태와 동률을 이루는 기록으로 역대 두 번째다. 그 외 2연패 이상은 32년 역사에서 6차례로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횟수다.


그중에서도 유일한 정규시즌 4회 연속 우승을 이룬 현재의 삼성은 역대 왕조 중 가장 탄탄한 전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2000년대 후반 SK가 4년간 320승 185패 .634의 승률로 삼성보다 더 적은 경기에서 많은 승수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2009년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의 왕좌를 KIA 타어거즈에 넘겨주고 만다. 그해 승률 계산 방식이 무승부를 패배로 간주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하나 엄연히 이사회에서 합의한 규정을 따른 결과다. 돌이켜보면 하루살이처럼(김성근 감독의 표현) 매 경기 전력질주를 했던 SK에 비해 두터운 선수층을 토대로 한 삼성의 야구가 지속성에 있어서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지 않았나 싶다.



약점 감추는 독수와 강점 내세우는 정수의 대결


류중일 감독은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삼성 시스템하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고 있다. (사진 출처 - 삼성 라이온즈)


어떻게 보면 올해 삼성에 강력한 도전장을 던졌던 넥센도 뒤를 보지 않는 절실함으로 승부를 걸었다는 점에서 2009년 SK와 닮은 점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선수들의 분업화로 짐을 함께 지운 당시 SK와 달리 올해 넥센은 소수의 선수가 수레를 이끌며 불완전 연소했다는 인상이 들기도 한다. 염경엽 감독은 플레이오프부터 문성현의 부상으로 3선발을 선택했고, 이후 한국시리즈에도 이 선택을 고수했다. 불펜 기용도 정규시즌과 달랐다. 정규시즌 불펜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던지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한현희였지만, 좌타자를 상대로 약점을 보여 과감히 필승조에서 배제했다. 중요한 순간 선발 3명, 불펜 2명으로 조금의 변수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독하디독한 강수. 

허나 6차전 경기에서 오재영의 투구수가 많아지자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만약 5차전까지 갔더라면 이 강수가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겠으나 야구는 계산대로 되지는 않는다. 염경엽 감독의 독수는 한현희에게는 말 그대로 독이 되었고, 팀을 조금은 경직되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디펜딩 챔피언 삼성은 이전과 거의 바뀌지 않은 일관된 전략을 취했다. 두터운 선발층에서 한 명을 불펜으로 돌려 4인 로테이션과 1+1이라는 지난해와 같은 투수기용을 했고, 라인업의 변화도 거의 없었다. 때로는 대타 상황에서 너무 선수를 믿어 패배 일보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으나 강력한 불펜과 타선의 힘으로 전형적인 삼성다운 역전을 이끌어 냈다. 류중일 감독의 조금은 경직된듯한 선수 기용은 삼성 선수단을 워낙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나온 고집이 아닌 뚝심이 된다. 이러한 분석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이며 양 팀의 경험 부족이 더 큰 변수로 작용했지만 말이다.



결국은 선수가 드라마를 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삼성 클린업 트리오는 항상 리그 최정상의 위치에 있었다. (사진 출처 - 삼성 라이온즈)


각기 다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두 팀. 결국 시리즈의 승자와 패자를 결정짓는 이는 감독이 아닌 선수들이다. 그중에서도 이번 시리즈는 투수보다 야수들의 활약에서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중심타선에서 박병호는 21타수 3안타, 강정호는 1차전 홈런 이후 무안타에 그치면서 MVP후보다운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플레이오프 이후에는 정규시즌에 비해 극도로 투고타저가 나타나곤 한다. 올해 넥센처럼 무리해서라도 소수의 투수가 많은 이닝을 책임지고, 그마저도 장타를 맞지 않기 위해 최대한 신중한 승부를 한다. 또 이 한 경기를 위해 세밀한 전력분석이 이뤄지면서 타자들의 부진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도 3, 4번 타자가 도합 .446OPS를 기록하면 대책이 서지 않는다. 특히 5, 6차전 14타석 동안 단 하나의 볼넷과 안타도 기록하지 못하면서 2경기 연속 1득점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수비. 3차전, 5차전 1점 차 상황에서 역전상황은 모두 실책에서 비롯됐다. 지난 6년간 팀의 간판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가장 큰 기여했던 강정호는 유격수로서 수비범위와 대쉬와 포구 등에서 불안함을 내비치면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기 전 너무나 찝찝한 끝맺음을 하게 됐다. 


반면 삼성의 최형우도 .850의 OPS로 정규시즌만큼의 타격은 하지 못했지만, 5, 6차전 결정적인 클러치 히팅으로 팀 승리를 이끌었다. 단기전 활약으로 정규시즌 두 선수의 가치가 달라지지는 않겠으나 가을의 영웅이 넥센이 아닌 삼성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한국 야구사 한 페이지에 오롯이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삼성 왕조 언제까지 지속될까?


현재 삼성 왕조가 무서움은 이러한 기세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올해 강력한 경쟁자였던 넥센은 강정호의 미국 진출이 유력하고, 다른 팀과는 9경기 차 이상의 큰 격차가 있었다. 유일한 변수는 FA 선수들의 이탈이나 모기업의 자금력이 우수하고, 군에서 제대하는 정인욱 등의 선수를 고려하면 지금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지 않을 전망이다. 이쯤 되면 V10에 빛나는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우승 기록 추월도 시간문제라는 예상을 하게 된다.


1980~90년대 해태는 광주일고로 대표되는 강력한 팜을 기반으로 팀 전력이 유지됐다. 그러나 1차 지명자 수가 1987년부터 3명, 1990년부터 2명, 1991년부터 1명으로 축소되고 1999년을 기점으로 고졸 우선지명이 폐지되면서 연고지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오히려 2차 지명에서 류현진, 윤석민, 오승환, 안치홍 등 1차 지명 이상의 대어급 선수가 늘어나면서 스카우트와 육성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2000년대 들어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으나 항상 우승 후보로 불렸던 두산이 1983년 최초로 2군을 창설하고, 연습구장을 만든 것은 유명한 이야기. 삼성도 1996년 경산볼파크를 개장해 선수들의 육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12년에야 챌린저스 필드를 개장한 KIA와는 무려 16년 차이. 이 차이를 하루 아침에 만회할 수 없다.


삼성 야수 엔트리의 최형우, 박석민, 박해민, 이지영, 김헌곤, 이흥련 등은 상무, 경찰청 시기를 포함해 모두 2군에서 단련의 시간을 적지 않게 거쳤다. 투수 엔트리에도 STC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은 선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 왜 삼성이 선수층이 두텁고, 독주체제가 이어지는 걸까? 다른 팀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루어진 투자. 그리고 2005년부터 김응용 감독이 구단 사장으로 팀을 조율하는 등 차별화된 프런트의 구성이 있었다.


나무로 치면 삼성은 뿌리가 깊고, 줄기가 튼튼한 나무다. 내년, 내후년 삼성이 반드시 우승한다는 보장은 없더라도 당분간 프로야구의 왕좌 자리에서 쉽게 내려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