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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메모

보이지 않는 무언가? 두산 야수가 증명하다

얼마 전 버스커버스커의 한 멤버가 넷상에 퍼진 정치적·지역 비하 용어를 써서 논란이 되었다. 그중에 숨겨진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을 지칭하는 '종범'이라는 야구 용어가 있다. 어원은 이종범을 평가할 때 스탯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누군가의 말을 비꼬면서 출발했다고 한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많이 쓰이는 OPS로 보면 확실히 이종범의 기록은 역대 최고라고 하기는 조금 모자라다. 통산 6921타석 동안 .828OPS. 전설로 회자되는 초기 4년 합산도 1.007OPS로 생각만큼 충격적이진 않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변호한 이종범 옹호론자는 비꼼을 당해야 마땅한 걸까? 현시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 메이저리그의 수비와 주루 스탯이 발전하고 WAR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포지션 플레이어에 대한 평가는 더욱 정밀해졌다. 이치로의 커리어 하이 OPS는 .869에 불과하지만, WAR로 환산된 그의 가치는 연봉 2000만 달러가 넘는 탑플레이어로 계산된다. 수비와 주루가 반영된 덕택이다.


국내는 여전히 수비 스탯 발전이 미진하나 WAR을 본격적으로 내세웠던 스탯티즈 기록실이 있었다. 스탯티즈 사이트의 야수 역대 WAR 1위는 94시즌 이종범으로 2위인 2003시즌 심정수보다 2승가량 높다. 초기 4년은 팬들의 기억만큼 압도적이며 커리어 전체로 해도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레전드로 불릴만하다. 스탯티즈가 수비와 주루를 제대로 구현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유격수라는 포지션 조정만으로도 이 수치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선수 비하로 쓰인 '종범'이라는 넷용어는 실은 OPS로 선수를 줄 세우려는 편향된 시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신바람 봉쇄한 두산 양궁 부대


이종욱, 김현수가 모두 빠진 상황에서 두산 외야는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사진 출처 - 두산 베어스)


서두가 지나치게 길었는데 플레이오프 3차전 두산은 KBO 기록실에는 나오지 않는 명장면을 탄생시키며 경기를 승리로 가져갔다. 5 : 3으로 앞선 7회초 원아웃 상황, 두산의 투수 홍상삼은 제구력이 다소 흔들리며 정성훈을 볼넷으로 진루시킨다. 다음 타자 이병규에게도 2스트라이크 후 풀카운트까지 어려운 승부를 했다. 그리고 다음 구 가운데 몰린 빠른 볼이 이병규의 방망이에 걸렸을 때 경기는 다시 혼돈으로 빠지는 듯했다. 그런데 김현수를 대신해 투입된 중견수 정수빈이 몸을 날려 그림 같은 다이빙 캐치에 성공하면서 1사 1,3루 찬스가 2사 1루 상황으로 바뀌게 된다. 세이버메트릭스 수치 WPA에 대입하면 정수빈의 이 수비로 두산의 승리할 확률은 13.7% 올라갔다. 두산 불펜진을 고려하면 더 큰 승리 기여다.


두산 수비수들의 활약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7회말 두산은 1사 2,3루 천금 같은 추가 득점 찬스를 놓치고 만다. 야구장 공기가 묘해지는 찰나 다시 풀카운트에 몰린 홍상삼의 공을 오지환이 제대로 걷어 올리며 좋은 타구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정수빈이 멋진 수비로 막아냈고, 홍상삼은 박수와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다음 장면이 더 기가 막힌다. 이번에는 손주인의 중앙을 가르는 안타 타구를 김재호가 깊숙한 수비 시프트로 잡아낸 후 몸을 빙글 돌려 멋진 송구로 아웃을 잡았다. 김재호 본인이 점프하며 손을 번쩍 드는 세레모니를 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수비였다. 덩달아 전체 두산 야수들의 사기가 얼마나 올랐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다고 이대로 무너질 LG가 아니었다. 9회초 LG는 전 이닝 수비에서 멋진 수비를 한 김용의가 우중간 3루타를 만들어낸다. 홍상삼의 투구수는 벌써 50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투수 교체를 해야 할 상황이나 김진욱 감독은 나머지 투수에 대해 신뢰하지 못했다. 홍상삼은 1점 차 1사 2루가 될 때까지 교체되지 못했고, 아니나 다를까 공을 이어받은 정재훈은 상대 타자 정성훈에게 안타를 맞으며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한다.



과감한 주루 플레이도 상대를 봐가면서 하지 않으면 낭패를 겪기 십상이다. (사진 출처 - 두산 베어스)


여기서 두산을 살린 것은 역시 명품 야수들. 좌익수 임재철은 자로 잰듯한 정확한 송구로 대주자로 나왔던 이대형을 한 박자 빠르게 잡아냈다. 이 정도로 끝나면 드라마가 아니다. 안타를 친 LG 정성훈은 공이 홈에 송구된 틈을 타 2루에 안착하면서 2사 2루 캡틴 이병규의 타석에 찬스는 이어진다. 정규시즌 타율 1위를 기록했던 이병규는 지난 4타석 안타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안타가 나올 시점, LG의 레전드는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1, 2루 사이에 기막힌 타구를 만들어 낸다. 다만, 이날의 주인공은 이병규가 아니었다. 우익수 민병헌은 강한 어깨로 홈플레이트와 3루 사이로 공을 던졌고, 포수 최재훈이 몸을 사리지 않는 블로킹으로 이날의 27번째 아웃을 잡아냈다. 최재훈은 이 플레이로 어깨 타박상을 입었다고 한다.


반대로 LG는 9회 동점을 만들 극적인 안타를 두 개나 때려내고도 경기를 잃는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두 개의 안타 모두 홈으로 들어오기에는 타구가 어중간했다. 최태원 주루코치는 이대형의 발을 믿고 팔을 힘껏 돌렸는데 두산 야수들의 어깨를 간과한 판단이다. 주자 스스로 문제도 있다. 이대형 정도의 경력이라면 주루 코치의 사인과 별개로 스스로 결정할 감각이 있어야 한다. 올해 이대형의 도루 성공률은 겨우 59.1%로 예견된 실패인지도 모른다. 문선재의 마지막 홈슬라이딩도 경기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다소 얌전하고 요령이 부족했다. 경기 전체로 보자면 LG도 멋진 수비 장면과 주루플레이를 보였지만, 외야수들의 어깨와 마지막 집중력에서 두산에 뒤진 셈이다.



두 번의 선발 착오, 궁지에 몰린 LG


LG 리즈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양 팀을 통틀어 정규시즌 가장 뛰어난 활약을 했었다. (사진 출처 - LG 트윈스)


그렇다면 LG에 있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무엇일까? 야수 쪽에서 시동이 더디게 걸리긴 했으나 이는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더 큰 문제는 선발을 내는 순서에 있다. 1차전 김기태 감독은 정규시즌 가장 뛰어난 피칭을 보였던 리즈를 미루고 류제국을 선발로 기용했다. 후반기 리즈가 살짝 부진하기도 했고, 상대 전적이 좋지 않아 이해할만한 선택이다. 그래도 정석은 아니며 선수의 상태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류제국도 괜찮은 피칭을 하긴 했으나 초반 흔들리면서 경기를 불리하게 끌고 갔다. 또 노경은보다 빨리 강판된 점도 감점사항이다. 반면 2차전 선발로 나선 리즈는 시종일관 강속구로 상대를 압박하며 완벽에 가까운 투구를 보였다. 만약 정규시즌대로 리즈를 먼저 투입했더라면 1, 2차전 모두 잡는 결과가 되지 않았을까?



3차전 선발은 더 변칙적이다. 우규민은 정규시즌 25번의 선발 등판 동안 139.0이닝 3.56ERA 3.28FIP를 기록하며 리그에 손꼽히는 활약을 했다. WAR로 봐도 토종 선발로는 윤성환, 송승준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높은 기여도로 나타난다. 왜 갑자기 포스트시즌에서 우규민의 등판을 뒤로 미뤘는지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우규민의 정규시즌 활약을 그저 우연히 잘한 정도라고 본다면 애초에 LG는 두산에 심히 밀리는 전력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승부의 분수령이 됐던 3차전 신재웅은 초반 2.2이닝 3실점 하며 내려갔고, 롱릴리프 임정우도 경기 흐름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결과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시즌과 역으로 가는 선택이었기에 온당한 비판이라고 여겨진다.


10년간 꿈꿔왔던 LG의 가을 야구. 이제 한 경기만 지면 끝내야 할 위기에 처했다. 특별히 어느 팀을 응원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규시즌 주인공처럼 화제 몰이를 했던 LG가 조금 더 힘내줬으면 하는 심정은 많은 이들이 느끼는 감정 아닐까? 수비와 선발 로테이션에서 변칙이 통하지 않았다면 정석으로 남은 경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뜨거운 잠실 라이벌 전 4차전에서 끝나든 5차전에서 끝나든 명경기로 기억에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